2022년 11월 6일

금오산에서 내려다보면 수철리 계곡이 보였다

하얀 길이 계곡을 따라 길게 이어져서 그 끝이 늘 궁금했다

언제고 저 길을 끝까지 가봐야지 했다

오늘이 그날이다

 

발연리 수박마을 하우스 앞을 지나다 할머니를 만났다

낫을 들고 하나도 급할거 없는 걸음으로 걸어오는 할머니를 보고 눈맞추고 웃었더니 

할머니가 따라 웃으며 "수박드시고 가유" 하신다

패딩 입고 다니는 날씨에 웬 수박이래

"하우스 저짝으로 가면 수박 덮어놨는데 익었으면 먹구가유"

엄청 긴 하우스 안쪽 끝 마른 풀더미 속에 수박 몇 덩이가 옹기종기 모여있다

우리를 뒤따라 온 할머니가 그중 큰 거를 골라 낫으로 쪼개신다 

어머나 뭔일이야 수박이 겁나 달다

"맛있쥬?"

할머니가 뿌듯해 하신다

두번째 달린 수박중에 남아있는 거란다

따뜻한 하우스 안에 철퍼덕 앉아 아흔 자신 할아버지 허리수술한 얘기

하우스땅을 아파트짓는 회사에 팔았다는 얘기 

할머니 무릎 수술한 얘기를 들어가며 달디단 수박을 먹었다

할머니가 담에 수박 살 때 딴거 보지말고 꼭지에 털이 있는지만 보라고 알려주신다

꼭지에 털이 없이 매끈해야 잘 익은 수박이란다

할머니한테 간식으로 챙겨간 견과류 한 봉지를 선물로 드리고 나왔다

마을 표지석에 무릉도원 수철리라고 써있다

어이없어서 웃었다

무릉도원이 애먼데서 고생하누먼

민속촌가든 산모퉁이를 돌아가니 웬걸 그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그야말로 무릉도원이다

아담한 저수지와 주변의 한가로운 집들이 그림같았다

나중에 로또 맞으면 이곳에다 집 한 채 마련해야겠다

계곡이 깊어 두시간을 걸어도 평온하고 아름다운 동네가 길 따라 이어진다

산 하나 넘으면 도고가 나온다는데 동네사람이 험한 고개길이라고 말린다

고개는 다음에 넘고 오늘은 길 끝까지 가보자

길 끝에 오래된 예배당이 있었다

간양리공소다

안내표지판에 오래전 박해를 피해 이곳에 숨어든 사연이 적혀있다

작은 예배당이 정갈하고 정겨웠다

기대하지 않고 예방당 문 손잡이를 돌렸는데 뜻밖에도 문이 열린다

최근까지도 사용한 흔적이 보인다

십자가 앞에서 두손을 모으고 기도를 드렸다

'이태원참사로 희생된 이들을 불쌍히 여겨 위로해주세요'

희생자들을 생각하면  수시로 눈물이 난다

 

나오는 길에 민속촌 앞에서 트럭을 얻어탔다

짐칸에 앉으니 카퍼레이드 하는 기분이다

이런거 참 재미지고 낭만적이다

오늘을 추억할 특별한 순간이다

기념사진을 남겼다

나중에 보니 나는 밭으로 품팔러갔다 집에 가는 행색이다

환상이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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