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3일
피고 지고 피고 지던 치자꽃이
두 송이 남았다
골목길에 들어설 때마다 애인을 만나는 것처럼 마음이 설레였다
이제는 떠나가는 치자꽃
아쉬워 허리를 깊게 숙이고 살뜰하게 향기를 맡는다
지나가는 내 또래 아저씨가 나를 보고 슬며시 웃는다
순하게 생긴 그니 눈빛이 치자꽃 향기를 잘 아는 사람이다
같이 가던 직원은 그 사람이 "이상한 아줌마다" 하는 표정이었단다
보고 싶은대로 보는 세상
내 왼쪽 어깨에 노란 동그라미가 찍혔다
치자꽃 옆에 있던 키가 껑중한 루드베키아
온 마음이 치자에게 가 있는 내게
루드베키아가 살그머니 흔적을 남겼구나
"아침에 너를 만나 나도 행복해"
루드베키아의 다정한 속삭임이 어깨에 묻었다
2023년 7월 23일
베낭이 가벼워야 여행이 자유롭다
고데기를 놓고 장고에 들어간다
오래전 테레비에서 칠십 넘은 할머니 배우가 말했다
"고데기 없이는 절대 어디를 가지 않아"
그 말은 여자인지 남자인지 무덤덤하게 사는 나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나의 일상에 고데기가 들어오고 꾸미는 재미가 오졌다
여행지에서도 유지하고 싶은 여성스런 일상
장고끝에 바람처럼 가벼운 여자사람이고 싶어 고데기를 베낭에 넣었다
2023년 7월 30일
짐을 점검하다가 결국은 베낭에서 고데기를 뺐다
한결 가볍다
2023년 8월 8일
누군가 한줌도 안되는 애기고양이를 쓰레기장에 버렸다
치킨집 아저씨가 발견하고 큰 박스에 옮겨 담아 공원가로등 아래에 두었다
아저씨가 관공서 여기저기 전화를 했는데 방법이 없다는 대답만 들었단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잠시 멈춰 박스 속 애기고양이를 들여다보다 가던 길을 간다
애기고양이가 잔뜩 웅크리고 꼬물거린다
근처 편의점에서 츄르를 사다 손가락에 묻혀주니 할짝할짝 많이도 먹는다
한치 앞도 모르는 애기고양이는 기운이 나는지 박스 안을 활보한다
밤은 깊어가는데 이 작은 생명을 어째야 하나
열한시가 넘어 근처 사는 할머니가 꼬마손에 이끌려 나오신다
아까 한참을 고양이랑 놀고 간 꼬마다
할아버지가 안된다고 하는데도 결국 할머니와 꼬마가 아기고양이를 데려간다
다행이다 참 다행이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복을 짓고
아기고양이가 복을 누리고
나는 마음을 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2023년 8월 11일
<풍문속으로 사라진 꾼>들이라고 해서 기대를 많이 했다
분명 볼거리이긴 했지만 <꾼>이라는 제목에는 미흡한 공연내용이었다
시시하다고 생각하다가 내가 조선시대 시골아낙이라 상상했다
마술처럼 무대가 신기하고 흥겨워졌다
한시간 동안 아주 잘 놀았다
2023년 8월 21일
도로가에 멀쩡한 토마토가 하나 떨어져있다
누군가 차에 탈 때 봉지에서 하나 떨어진 것 같다
멀쩡해도 길에 떨어져 있는 걸 줍기가 망설여져 지나친다
이내 반성한다
귀한 먹을거리다
되돌아가 토마토를 주웠다
2023년 8월 24일
댄스교습소에 신입이 들어왔다
흥이 넘치는지 안무 몰라도 펄펄 난다
몇몇이 그를 비웃는다
나는 그들에게 처음 온 자리인데 기죽지 않고 춤추는 그 사람이 멋있었다고 말했다
근데 사실은 수업시간에 그니를 보고 나도 그들처럼 저 사람 뭐여~했다
비웃는 사람을 비웃다가 나와 그들이 하등 다를게 없다는 걸 인정한다
2023년 8월 25일
라오스공항에서 가방을 하나 샀다
남은 라오스돈을 쓰기 위해 별 생각 없이 산 가방이다
매일 그 가방을 들고 출근한다
라오스사람의 손길을 느낀다
물건과도 인연이 있는 것 같다
내가 라오스를 오래오래 그리워할 것을 알고 그 순간 이 가방이 나를 불렀나보다
2023년 8월 30일
재활용쓰레기 몇개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쓰레기봉투를 들고 있던 아줌마가 자기가 버려준다고 달라고 한다
괜찮다고 사양하는데 가는 길인데 괜찮다고 자기 주고 출근하라고 한다
아줌마의 작은 친절에 출근길이 너무나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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