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니가 여섯시 차 타고 가면 춥고 어둡다고 일찍 가라고 하신다
무수 하나 호박 반덩이 챙겨들고 엄니네를 나선다
기울어가는 겨울햇살이 온기는 없이 눈부시게 빛난다
마음까지 환해진다
하천둑길을 따라 들판을 걷는다
하얗게 핀 갈대꽃이 하천을 가득 메웠다
석양빛에 비춰진 마른 풀들이 꽃처럼 화사하고 아름답다
들판 한가운데쯤 왔는데 저쪽에서 남자가 걸어온다
동네와 멀리 떨어진 농로에서 남자를 만나니 긴장이 된다
농사일이 없는 빈 들녁을 일없이 걷는 사람이라니, 제정신이 아닌 사람일지 몰라
논사이로 가는 샛길로 빠져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
근데 하천둑길이 너무 아름답다
이쁜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중인 사람한테 무슨 짓을 하지는 않겠지
나혼자 수선이었다
가까이 다가온 남자는 순하게 생긴 시골아저씨였다
이쁜이는 애먼사람 변태 만든다고 나를 타박한다
그러게나 말이다
내가 이렇게 한적한 겨울들판을 걷는 거는 낭만적인 일이고
남이 이렇게 하면 별난 일인거냐
세월아 네월아 걷고있는데 엄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순철네 앞에서 보니 찻길에 내가 안보이더라고 어디냐고 하신다
요구르트 가져가랬는데 빼놓고 갔다고 젊은애가 정신이 왜 그러냐고 한참을 두런거리신다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
오래전 내가 열몇살일 적에 청양이모가 왔다갈 때면
할머니는 골목끝에 서서 오래도록 이모뒷모습을 지켜보셨다
이모가 보이지 않으면 그제서야 눈물을 닦으며 돌아서셨다
추위를 많이 타는 엄니가 요구르트 들고 순철네까지 일부러 나오셨다
다음주면 또 오는 며느리인데 오늘 안가져간게 서운하시다
안보이는 내모습을 한참 찾았을 엄니를 생각하니 애틋하다
엄니한테 다녀올 때면 마음이 늘 이렇게 아프면서도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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