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8일
덥다
양산쓰고 나무그늘아래로만 느릿느릿 걷는다
저쪽에서 자전거를 탄 무리가 온다
운동복에 모자까지 제대로 갖춘 젊은이들이다
한낮의 땡볕에 검붉게 그을린 젊은이들은 먼데서 온듯 했고 먼데까지 가는거 같다
반팔 아래로 드러난 팔뚝이 아주 새까맣고 기운차다
젊을 때는 저렇게 젊어야 한다
갑자기 주름 기미 걱정하며 양산쓰고도 그늘만 찾는 내가 시시해졌다
2020년 7월 20일
"규보 첫사랑 만난대"
"엄니 첫사랑은 효민이야 효민이 보고 싶다"
"내 첫사랑도 효민인데"
"탁이첫사랑 서연이 아녀?"
"그거하고 달라 진짜 사랑은 효민이야 나 효민이 처음 만날 때 너무 이뻐서 나무 뒤로 숨었어"
"축제때?"
"아니 그때보고 며칠동안 톡만 하다가 처음 만나기로 한 날 저쪽에서 걸어오는데 와 진짜 너무 이쁜거야 그래서 나무 뒤로 숨었어"
탁이가 너무너무 사랑했던 효민이
탁이랑 너무너무 잘 어울렸던 효민이
나도 너무너무 좋아하는 효민이
2020년 7월 21일
초록벌판에 노란 기생화가 지천으로 피었다
부는 바람따라 흔들흔들 살랑살랑거리는 꽃들이 황홀하다
양산쓰고 꽃처럼 걸으며 아름다운 풍경을 음미한다
길 끝에 있는 정자에서 고스톱치던 아낙이 나를 보고 "우아하시네요"한다
무더운 한낮 들판의 정자에 나와 수박먹으며 고스톱을 치는 여인들이 명랑하다
서로가 보기 좋다고 처음보는 우리는 웃는다
2020년 7월22일
출근길에 나팔꽃을 보며 내가 울애기들한테 이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울애기가 나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2020년 7월 24일
어제 비가 많이 내렸다
쓰레기와 부유물로 더러웠던 하천이 깨끗해졌다
사라지지 않고 자리만 옮긴 오물들
지금 이 순간 내가 서있는 여기만 보고 좋아할 수 없는 세상
2020년 7월 27일
엄니네집에 우유 두개 남아있는걸 편찮으신 이더러작은아버지 갖다 드렸다
한주일 동안 엄니 드실게 없어서 대술주소로 멸균우유 한박스랑 간식거리를 주문했다
저녁에 엄니한테 전화가 왔다
"너 돈벌어서 다 나한테 투자할거냐 ? 저런걸 왜 사서 보내냐 너두참"
투자라는 말 때문에 이쁘니랑 한참 웃었다
8월3일
생전 처음 보는 물난리
정자 지붕 위까지 물이 찼던 길을 걸을 때마다 무섭다
2020년 8월 8일
걷는 즐거움
춤추는 즐거움
기타치고 노래하는 즐거움
글쓰는 즐거움
울애기하고 대화하는 즐거움
나의 일상을 채우는 즐거움으로 나는 조증
2020년 8월 11일
비둘기 두마리가 전깃줄에 앉아 서로 그냥 아주 이뻐 죽을라고 한다
더 가까이 가서 찍으려고 했더니 슬그머니 한발짝 떨어져서 열심히 딴데 본다
이렇게 눈치가 멀쩡한 비둘기라니
괜히 꽁냥꽁냥 다정한 커플을 내가 훼방놨다
비둘기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2020년 8월 12일
인터넷으로 계란을 한 판 샀다
스티로폼 상자
빵빵한 충격완화뽁뽁이
얇은 비닐포장
투명플라스틱 덮개
전단지
그 아래에 계란이 들어있다
몸에 좋은 계란 한번 먹겠다고 내가 너무 많은 쓰레기를 만들었다
2020년 8월 18일
이쁘니가 토요일에 왔다
일요일날 엄니네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이쁘니를 보신 엄니가 좋아서 양팔을 벌리고 뛰어오셨다
오늘 이쁘니가 7시차로 서울로 돌아갔다
이쁘니가 없는 집이 허전하다
엄니한테 전화가 왔다
"너무 서운해하지 말고 밥 잘 먹어라"
엄니도 나처럼 허전했구나
2020년 8월 16일
이쁜이말이 뱃속에서 나올 때 안에다 엄마 만만하다고 써놓고 나왔다고
그래서 탁이도 저처럼 엄니가 만만한거란다
탁이한테 물어봤더니 써놓은거 봤다네
2020년 8월 17일
왜 이러고 있는건지
희한하고 구여워라
2020년 8월 20일
키작은 옥수수나무가 옥수수 하나 제대로 키워냈다
얼마나 뿌듯할까
2020년 8월 21일
출근길에 거래처사장님을 만났다
순박한 성품이신 사장님이 몇번이나 고개숙이며 인사를 하신다
겸손한 그 모습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일상적인 행동이 누군가의 행복이 되는 사람
나도 그런 사람이되도록 노력해야지
2020년 8월 21일
얼마전 산책길에 앙증맞은 보라색 별모양꽃을 보았다
향기도 좋은 그 꽃 이름이 궁금해 사무실로 돌아와 검색했는데 이름을 찾지 못했다
까먹고 있다가 오늘 산책길에 그 꽃 옆에 초록색 박주가리가 달린 것을 보았다
줄기를 따라가니 꽃과 열매가 같은 줄기다
박주가리꽃
이름을 알게 돼서 참 좋다
2020년 8월 21일
택배박스를 납작하게 접어 재활용품장으로 간다
경비아저씨가 박스를 착착 접어 쌓아놓았다
그 위에 알맹이만 빠진 박스 몇개가 함부로 나뒹군다
쯧쯧 배려심도 없네
흉보는 마음
그러는 나는...
내가 택배박스를 접어 내놓기 시작한게 얼마전이다
경비아저씨가 박스를 정리하는 것을 본 뒤부터다
그전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박스를 그대로 내놓았다
배려심의 문제가 아니다
보이지 않아 모르는 것이고 모르니 보이지 않는 것이다
뭐좀 한다고 잘난 척좀 하지 말자
2020년 8월 22일
엄니네 가려고 차턱에 나왔는데 엄니한테 전화가 왔다
대술에 비가 엄청 온다구 오지말라고 하신다
아까 쏟아붓던 비구름이 대술로 갔나보다
비가 많이 오면 그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그냥 나올 생각으로 버스를 탔다
엄니네 동네인데 아직도 빗줄기가 거세다
이 비속에 엄니네 가면 오히려 엄니가 걱정하실거 같다
그냥 지나쳐 이티 들렸다가 나오는데 빗줄기가 잦아든다
농막에서 내려 걸었다
방금전까지 비내린 동네뒷산 골짜기마다 안개가 은은하게 피어오른다
이 순간 여기에서만 볼 수 있는 멋진 풍경
아름답다
2020년 8월 23일
알바끝나고 열두시에 탁이가 왔다
에어콘을 틀어주니 탁이가 하는 말
"60년생은 안더워? 왜 에어콘을 안틀구 있어?"
2020년 8월 27일
옆자리직원과 함께 산책했다
이삭이 팬 논을 보면서 우리는 모심던 때 얘기를 한다
시간 진짜 빠르게 지나간다
부드럽게 흐르는 논둑길이 참 예쁘다고 하니 그니가 나를 멀뚱멀뚱 쳐다본다
내 나이쯤 되면 풍경이 눈에 들어올거같다고 자기는 지금은 아무 생각이 없단다
그니는 코로나 때문에 집에 있는 애들 삼시세끼 챙기는게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이다
오십대 중반 자식숙제 끝낸 나는 사십대중반의 그니가 안쓰러웠다
2020년 8월 27일
밤에 자두랑 산책하는데 느닷없이 비가 내린다
골목 어느집 추녀밑에서 한참동안 비구경했다
괜찮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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