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들어가는 초입 건물앞 시멘트포장에 새겨진 묘한 ' 멸공"

결코 이쁨과 어울릴 수 없는 단어가 차돌로 총총 박히니 순정해보이기까지 하다

게다가 위에 겹따옴표 돌 하나 빠지니 심지어 구엽다

쪼그리고 앉아 돌조각 하나하나 줄맞춰 박고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그려진다

오늘 판교여행이 기대되는 순간이다

 

판교가자고 보름전에 날 잡고 기차표 사놨는데 일기예보가 일요일 비오고 바람 불거라고 한다

나는 가기로 했으면 날씨 상관없이 무조건 가는거지만 미환언니는 수원이다

멀리서 나서기에는 일스러울거 같아 전날 오지말라 했더니 언니는 상관없단다

아주 딱 내 스타일이야

순한 날씨보다야 어렵겠지만 비오고 바람 부는 날 여행하는 운치도 있는거지

각오하고 있는데 웬걸 아침에 일어나보니 부슬비 이슬비만 날린다

안개까지 근사하니 일부러 연출한 날씨처럼 여행하기 딱 좋은 날이다

 

판교 동네 전체가 과거의 얼굴을 하고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흔히 볼 수 있는 면동네다

내 기대에는 못미치지만 특별한거 보자고 나선 길 아니니 느긋하게 동네산책에 나선다

그러다 곧 평범한 산책이 아주 특별한 시간으로 변한다

동네 곳곳에 아까본 한조각 떨어져나간 큰 따옴표 차돌처럼 오래된 집들이 아련하게 서 있다

과거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이곳에서 엉덩이 빼고 빼꼼히 들여다 보는 시간의 틈새

그 틈새로 보이는 해묵은 풍경이 정겹다

그중 몇은 금방이라도 주저앉을거 같다

이 아름다운 모습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을 생각하니 안타깝다

이곳이 누군가의 손길로 더 오래오래 간직되었으면 좋겠다

풍상에 닳아 점점 흐려져가는 풍경은 사람을 순하고 편안하게 만든다

판교에서 나는 어린아이처럼 유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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