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서 탁이와 헤어지고 혼자 걷는다

탁이와 함께 걸을 때는 재밌고 좋아서 행복하고

혼자서 걸을 때는 자유로워서 행복하다

좀더 물가로 걸을 욕심에 도로에서 벗어났다

둑길로 들어서며 앞을 바라보니 길이 가다만다

그래도 좋다 헤매기로 한다

낚시가게에서 아저씨 둘이 길없는 길로 접어드는 나를 쳐다본다

길이 생각보다 험하다

어깨까지 올라오는 마른 덤불이 둑길을 숨기고 있다

발로 밟고 손으로 밀며 헤치고 나오니 비탈이다

미끌어지며 비탈을 올라오니 몇년은 사람그림자도 못봤을 것같은 넓은 공터가 나왔다

공터 끝에는 사나운 개가 왕왕거리는 집이 한 채 있었다

그집 마당을 지나야 큰길로 나갈 수 있는데 도저히 그 개 앞을 지나갈 자신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잡목이 빽빽한 비탈로 내려선다

가시나무가 듬성듬성 섞여있어 조심스레 잡목울타리를 헤치고 나오는데 트럭 한 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아주머니 어디서 오셨어요?"

"예산이요"

"아유 근데 왜 길로 안다니고 위험하게 그런데로 다니신데요?"

"그냥요 재밌어서요"

"제가 이동네 향토연구회 회원인데요 저쪽으로 올레길이 있어요 거기는 위험하지도 않아요

아까 아주머니가 가시는 거보고 혹시나 해서 온거예요 가끔 자살하는 사람이 있어요"

세상에나 내가 지나쳐온 어느 곳에선가 누군가 자살을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자유롭고 재밌고 행복했던 그 길이 누군가는 스스로 목숨을 거두기 위해 숨어드는 길이었다

 

앉아있는 청둥오리가 날아오른다

청둥오리랑 기러기랑 어떻게 다른지 봐도봐도 모르겠다

코맹맹이는 청둥오리고 소리없는건 기러긴가?

그럼 내가 저번에 대술서 본 것은 청둥오리인가?

청둥오리기러기 헷갈려하며 동산교를 건너니 저수지 위에 길 하나가 둥둥 떠있다

길지 않은 그 길 끝은 잡목이 숲을 이루고 있는 작은섬이다

낚시꾼들과 차량들이 많은 이쪽을 지나 섬 뒤쪽으로 가니 저수지물이 바닷물처럼 출렁거린다

출렁출렁 달그락달그락

달그락? 생뚱맞은 소리에 뭔가 하고 보니

녹지 않은 얼음장과 풀린 물이 만나는 경계에 얼음조각들이 모여 달그락달그락거린다

봄과 겨울의 경계가 여기였구나

 

문득 잠바앞자락에 붙은 풀씨를 발견한다

아까 마른덤불 속을 헤맬 때 떠나기를 학수고대하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내옷에 달라붙은 풀씨다

아마도 그 일대에서는 가장 출세한 풀씨겠다

고향에서 삼킬로 정도는 벗어났으니말이다

풀씨가 새로 정착하기 딱 좋은 곳에서 내가 풀씨를 보게 되다니

혹시 얘네들이 바로 여기라고 나에게 신호를 보낸건가?

땅콩만한  고것들 세개를 떼서 기분좋게 던져줬다

 

탁이와 헤어지고 네시간을 더 걸었다

어려운 줄도 모르겠고 힘든 줄도 모르겠더니 저 멀리 예산가는 버스를 본 뒤로 다리가 풀린다

하탄방리 정유소에 잠시 주저 앉았다

배가 고파 과자를 우걱우걱 먹고있는데 할아버지 한분이 지나가신다

안녕하세요~인사를 건네니 옆에 와서 앉으신다

그뒤 잠깐 사이에 그 할아버지 가족사를 다 알게 됐다

아드님은 서울 어디 구세군 목사고, 49살인 큰 딸은 키가 175여서 여고 다닐 때 배구를 했고, 사위는 인천 어디 동장하고 할머니는 신풍서 살다 대구간 사람이고 할아버지는 공주고등학교시절 육상선수였다가 고대앞에서 3년 장사를 하셨고....

길 위에서 편안한 사람 만나 이렇게 다부랑다부랑 얘기하는거 정겹고 여유있어 너무 좋다

덕이 있는 얼굴이라고 부자될 상이라는 덕담까지 들은 나는 좋아 죽겠다

 

반은 탁이와 함께 재밌게

반은 나혼자 자유롭게

예당 한바퀴 잘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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