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짧은얘기 - 9월~10월
023년 9월 5일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가구 조립의 달인이었다
반복되는 작업을 놀라운 속도로 해내는 단순노동의 달인이려니 속단했다
그는 속도의 달인 그 이상이었다
가구를 만드는 일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 일을 더 멋지게 하기 위해 나무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인도네시아로 유학도 갔다왔단다
그에게 가구조립은 생계를 위한 직업이면서 예술이었다
삶에 대한 철학이 멋진 사람이었다
탁이도 저니처럼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청년이 유학얘기를 꺼내기 전까지 나는 그를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단순한 일을 열심히 하며 사는 성실한 청년이라고만 여겼다
유학얘기를 듣고난 후 그 청년이 비범해 보였다
내가 직업 학벌에 대한 편견이 어마어마한 사람이다
날마다 맑고 밝은 생각으로 살겠다고 다짐해도 그 다짐은 그저 입술에만 매달려있다
2023년 9월 6일
엄마 아버지 돌아가신 일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받아들이면서
고릿적 억울한 일은 왜 잊지 않고 수시로 끄집어내서는 괴로워하는지 참 모를 일이다
2023년 9월 7일
링컨대통령아버지가 구두만드는 사람이었단다
링컨이 대통령이 된 후 취임연설을 하려는데 귀족계급의 의원이 다가와 말했다
"당신 아버지가 내 구두를 만들었다 여기 있는 많은 사람들이 당신 아버지가 만든 구두를 신고 있다
당신 출신을 잊지 말라"
링컨이 연설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 아버지는 구두만드는 사람이었다 여기 이 자리에도 내 아버지가 만든 구두를 신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구두가 맞지 않으면 나한테 말해달라 내가 아버지한테 구두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내가 고쳐주겠다"
타인이 나를 모욕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를 모욕하는 것이다
2023년 9월 9일
네드 달링턴이 예산에서 공연했다
어린왕자처럼 맑고 귀엽게 생긴 양반이었다
그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어떤 곡을 연주할지 설명한다
그리고 기타를 소중하게 품고 눈을 지그시 감는다
사방이 조용해진다
연주가 시작되고 그는 그만의 세계로 점점 가라앉는다
그가 얼마나 깊이 깊이 그만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는지 그의 표정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나는 그의 깊이가 너무나 부럽다
접시만큼의 깊이도 없는 내 기타가 너무나 안타까운 밤이다
2023년 9월 13일
한쪽이 열려진 베란다중문으로 나간 자두가 닫힌 문 앞에서 들어오지를 못하고 저렇게 앉아있다
불러도 멍 하니 앉아만 있는다
나가서 자두를 안고 들어올 때마다 마음이 불안하다
늙은 우리 자두가 혹시 치매증상인건가
요새 자두가 사과를 잘 먹는다
자두가 또 저러고 있길래 사과를 보여주면서 자두야 사과먹자~했더니
멀쩡하게 열린 문으로 들어온다
이쁜이 진단으로 자두가 관종이다
2023년 9월 16일
미경언니랑 노래부르면서 예당들판길을 걸었다
검은구름이 모여들더니 슬금슬금 빗방울이 떨어진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진다
심상치 않다
길가 비닐하우스로 들어가 비를 피했다
양동이로 들이 붓는 것처럼 비가 쏟아진다
계속 걸었더라면 들판 한가운데서 완전 물폭탄 맞을 뻔 했다
언니가 이 참에 득음한다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데도 빗소리에 묻힌다
황순원의 소나기같은 산책이었다
2023년 9월 21일
바람이 서늘하다
저 멀리서 지금 가는 중이라는 겨울의 기별을 받은 아침
2023년 9월 22일
아침햇빛이 따뜻하다
가을이다
2023년 9월 23일
내 삶의 속도와 방향이 참 괜찮다고 생각하다가도
백화점에 가면 화려함에 쏠리고
재산 늘었다고 하는 친구 앞에서는 초라해지고
내 마음 깊은 곳 진짜 내 마음을 아직 모른다
2023년 9월 26일
이균용 김행을 보면
자신들의 과오를 안들킬 것이라고 생각하는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통과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 같다
2023년 9월 26일
댄스센타에 멕시코사람이 놀러왔다
강사 지인이라고 했다
무쵸 구스토
부에나스 노체스
두마디 했더니 그니가 놀라면서 좋아햇다
매일 점심산책시간에 스페인어를 듣는다
간단한거 몇개는 머리에 입력이 됐는데 태반은 매번 처음 듣는 것처럼 복잡하다
진도가 나가지 않으니 싫증도 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수시로 올라온다
오늘 두마디 하고 엄청 뿌듯하다
포기하지 말아야지
2023년 9월 27일
출근하는 골목길 작은 화단에 치자꽃이 활짝 피었다
몇달 전 시드는 치자꽃을 보며 이제 내년에나 다시 볼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그 마음 때문이었나
그제도 어제도 이 앞을 지나치며 화단을 보았건만 치자꽃을 보지 못했다
마음이 준비되어있지 않으면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듣지 못한다
2023년 9월 28일
자두하고 역전장에 다녀오는 길이다
열살 남짓한 꼬마 대여섯명이 우루루 걸어오는게 귀여워 눈을 맞추고 웃었다
걔중 한 아이가 스스럼 없이 안녕하세요 인사를 한다
안녕? 니들 어디 가? 했더니 시장으로 오뎅 사먹으러 가는 중이란다
자두를 보고 쓰다듬어도 돼요? 몇살이예요? 얘랑 저랑은 남매고 쟤들은 친구고 우리는 어디 살고 쟤들은 어디 살고
부동산가게 앞에서 가던 길 멈추고 한참을 조잘거린다
사장님이 나와 아저씨담배 펴야 한다구 저리 가서 놀라구 하니 추석 잘 보내세요 하고 간다
의젓한 꼬마친구들한테 나도 추석 재밌게 보내 인사했다
2023년 9월 29일
탁이하고 예향칼국수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뒷자리에 손님이 앉는 기척이 난다
주인아줌마가 물을 갖다주니 할머니가 말한다
"가는데마두 다 문닫아서 여기루 왔슈"
2023년 10월 2일
오래된 소나무 아래 한 여자의 행동이 수상하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나무를 쓰다듬는다
여자가 느린 걸음으로 나무 주변을 천천히 걷는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 여자가 정신이 온전하지 않아 보인다
이쁜이한테 저 사람 이상해보이지 않냐고 물었더니
"딱 엄만야 엄마가 저러구 다녀"
2023년 10월 2일
연휴동안 이쁜이랑 자두데리고 여행을 가기로 했다
인터넷으로 자두가방도 열흘 전에 사놨다
자두가 가방에 적응하라고 짬짬이 가방을 꺼내 같이 놀았다
오늘 익산가는 기차를 탔다
자두가 잠시도 가만있지를 못하고 가방 밖으로 나온다
거친 숨소리가 안쓰럽다
이대로 익산까지 가다가는 자두한테 일이 생길 것 같다
홍성에서 내렸다
홍성 시내를 활보하는 자두가 너무 이뻤다
멀리 안갔어도 오늘 멋진 여행을 했다
2023년 10월 5일
늙어가는 얼굴이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서 거울을 볼 때 돋보기를 쓰지 않았다
오늘 어쩌다 돋보기를 쓰고 거울을 봤더니 세상에나 아랫니 네 개에 검은 점들이 주근깨처럼 묻어있다
양치를 해도 지워지지 않고 휴지에 치약을 묻혀 문질러봐도 소용없다
늙는건 어쩔 수 없대도 추레하지는 말아야하는데 이게 무슨 꼴이람
치과에 갔더니 커피 같은것 때문에 착색이 되서 그렇단다
다행히 스케일링을 했더니 없어졌다
내눈에만 보이지 않는 얼룩이 얼마나 많을 것인지 참 심란한 일이다
2023년 10월 9일
아파트 뒤 골목
니땅도 내땅도 아닌 골목에는 언제나 쓰레기가 버려져있다
계단을 가끔 쓰는 할머니가 있고
골목으로 대문이 난 집주인이 가끔 청소를 하는 그곳을 지날 때마다
지나다니기만 하는게 미안했다
휴일이면 그 골목청소를 할까 생각하다가도 미적대기만했는데
오늘 드디어 검은봉다리와 일회용장갑을 들고 나가 청소를 했다
생각만 한 일년한거 같다
마음먹은거 행동으로 옮기는게 이렇게 어렵다
2023년 10월 9일
나약한 아비 감상적인 아비 비겁한 아비 무책임한 아비
장국영 아비야
너의 아픔은 이해하겠지만 같이 아파해주지 못하겠다
네가 살아가는 방식은 한심하기짝이 없다
아비정전을 볼 때마다 내가 나이든걸 절감한다
이 나이는 장국영도 커버를 못한다
2023년 10월 10일
출근길에 옆자리 직원이 뒤따라 온다
"언니 신발 커?"
신발창을 깔았더니 깊이가 낮아져 신발이 헐떡거리는데 그걸 보았나보다
별얘기도 아닌데 그 말에 빈정이 상한다
이런 말을 지적으로 받아들이는 내가 옹졸하다
2023년 10월 10일
어린 민들레에 제초제를 뿌리면 기어이 홀씨까지 만들어내고 죽는다했다
한살이에 대한 본능으로 죽음을 앞두고 최선을 다하는구나
그 말을 듣고 민들레의 처절함에 숙연했다
오늘 제초제가 성장을 극대화시켜 식물을 말려 죽이는 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린 민들레를 거창하게 오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