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짧은얘기 - 1월~2월
2023년 1월 1일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 뒤에 숨어서 자두를 부른다
우리 자두 코도 맹 귀도 맹
바로 제옆에 있는 줄도 모르고 쌔앵 지나가버린다
2023년 1월 6일
천지를 덮었던 눈들이 흔적 없어진다
저 돌의자도 나처럼 눈이 아쉬웠을까
햇빛이 무서울 눈을 제 그늘에 숨겨 보호하고 있다
저 눈들
내 생각만큼 오래 살아남지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내 생각만큼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2023년 1월 9일
집이 같은 방향인 직원과 함께 사무실을 나선다
직원이 휴대폰을 보느라 걸음이 심하게 느리다
그 걸음에 맞추려니 슬슬 부아가 난다
혼자 멀뚱멀뚱하다가 "나 먼저 갈께" 인사했다
직원이 깜짝 놀라며 "왜? "한다
'배려하는 마음이 없는 너랑 같이 가기 싫어서' 하고 싶은 말을 꾹 참는다
'에이 속좁게 그까지것 조금 기다려주지' 하다가
나하고 싶은 대로 해버린게 통쾌해서 '잘했어 아주 잘했어' 나를 칭찬해줬다
2023년 1월 25일
설 쇠러 온 이쁜이가 오늘 갔다
허전한 마음에 눈물이 자꾸 난다
썰물처럼 한꺼번에 가버리는 자식들 차를 향해 대문간에서 손을 흔들던 엄니 모습
다니러온 청양이모가 돌아가는데 골목 끝에서 이모가 안보일 때까지 서 있던 외할머니
아직 외할머니만큼 엄니만큼 늙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 자식이 그리워 눈물바람이다
큰일이다
2023년 2월 1일
사업장현황신고에 연말정산에 사무실이 바쁘다
바쁘니 전화를 잘 받지 않는다
나만 받냐 나도 안받는다
용심이 나서 뻗대는데 괴롭다
차라리 전화벨이 울리면 얼른 받는다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2023년 2월 4일
"보름에 동치미 먹으며 일할 때 벌레가 문다는데 그것도 모르고 아까 동치미를 먹었다"
내일이 대보름인 줄도 몰랐다며 엄니가 걱정하신다
2023년 2월 9일
튀르키예에 기부금을 보내는데 무기명으로 할거냐고 묻는다
생색내고 싶은 마음은 무기명 글자 앞에서 부끄럽다
연말정산할 때 기부금 얼마 냈다는 자료에 으쓱한다
무기명 위에서 망설이다 실명으로 옮겨 처리한다
세액공제도 받고 흔적도 남겼다
부끄럽지만 내 그릇이 요만하다
2023년 2월 11일
밭에 나가시는 작은엄니를 만났다
내 손을 붙들고 반가워하신다
"자네 만날 줄 알았으면 돈이라도 갖고 나와서 다만 천원이라도 줄걸"
2023년 2월 14일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
작은일에 마음을 쓴다는거 참 중요하다
백짓장도 맞들어 주는 사람으로 살아야지
2023년 2월 16일
다른 사람이 내게 백짓장도 맞들자고 하기를 기대하지는 말기
2023년 2월 17일
박주가리 씨앗 하나 허공에서 내려온다
그늘진 좁은 골목은 더군다나 포장길
내려오던 씨앗
여기는 아니다
하늘 하늘 기다란 솜털로 허공을 디디며
위로 위로 헤엄쳐 오른다
푸른 허공으로 풀어지는 솜털이 노련하다
원하는 곳 찾아내어
꼭 꽃을 피워내기를 기도했다
2023년 2월 18일
윤식이가 놀러왔다
내가 보여주고 싶은 예산의 풍경 중 하나가 골목풍경이다
읍내구경갔다가 가로등이 켜진 골목골목을 찾아 걸었다
오래된 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 정겨워 나는 신났다
허거덩 윤식이가 골목이 무섭다고 한다
2023년 2월 23일
윤식이를 드가에 데려갔다
그새 꼬마스피커가 하나 더 늘었다
블루투스 스피커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참이다
사장님이 성능이 좋다고 하신다
가격도 크게 부담스럽지 않다
며칠 고민하다 그보다 저렴한 걸로 주문했다
이제 휴대폰을 큰 그릇에 넣고 진동을 키워 음악을 듣는 일은 없겠다
스피커가 이틀만에 도착했다
미제물건이라더니 설명서가 죄다 영어다
탁이랑 나랑 스피커 멀뚱멀뚱 들여다만 보고 있다
2023년 2월 27일
계단이 말갛게 쓸려있다
정갈한 계단을 밟으며 출근하는 내 마음이 설레인다
이른 아침 살그머니 골목길을 청소하는 할머니의 여유로운 마음
만나게 되면 꼭 할머니하고 친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