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림자

늙은농부

천천히2 2020. 12. 29. 13:54

 

산책길 옆으로 크지 않은 밭이 있다

할아버지가 밭에 대파 심고 고추 심어 키운다

할아버지성품이 어찌나 정갈하고 손끝이 야무진지 밭고랑에 풀 한포기가 없다

언제나 밭이 안마당처럼 말끔해 지나칠 때마다 감탄한다

지난 가을 아직 따야 할 고추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데 서리가 내리도록 할아버지가 안보인다

깔끔하신 양반이 밭을 이렇게 냅둘 적에는 뭔 일이 있는거다

산책나갈 때마다 할아버지가 다녀가신 흔적이 있나 유심히 살폈다

고추는 밭에 매달린 채로 노랗게 말라가고 겨울이 되어도 할아버지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노인이 오래도록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많이 편찮으신게야

어쩌면 멀리 떠나셨는지도 몰라

그저 밭에서 일하시는 모습만 몇번 봤을 뿐 인사한번 나눈 적 없는 할버지의 부재가 많이 슬펐다

얼마전에 고춧대가 뽑혀 밭가생이에 쌓였다

할아버지 흔적인지 할아버지자손들이 한 것인지 반갑고 궁금했다

오늘 산책가는데 고춧대쌓아놓은 곳에서 하얀 연기가 풀풀 올라온다

먼발치에서도 연기냄새가 향기롭다

가까이 가니 하얀 연기 속으로 할아버지 뒷모습이 보인다

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고개를 옆으로 돌려 불길을 바라보고 있는 할아버지 뒷모습이 무척 쓸쓸해보인다

내가 내년에 또 고추를 심고 거둘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산책에서 돌아오다 보니 고춧대가 거의 다 탔다

할아버지가 불피운 자리를 정리하신다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내년봄에 다시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