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림자

김장김치

천천히2 2020. 11. 27. 10:19

김치냉장고가 없어 엄니네서 김치를 조금씩 덜어다 먹는다

엄니가 김치가 맛있게 익었다고 전화하셨다

찹쌀도나스 한봉지 사가지고 대술에 갔다

엄니가 콩밥을 해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금방 지은 콩밥을 한숟가락 떠서 그 위에 배추김치를 길게 찢어 올려서 먹었다

먹방의 신음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김치가 간도 딱 맞고 아삭아삭 싱싱해 환상적이다

희한한게 엄니네서 이렇게 먹으면 맛있는데 집에 와서는 당최 그 맛이 안난다

빨갛게 양념 묻은 손가락 빨아가며 거하게 고봉밥 한 공기 비웠다

 

형님이 김치를 한통 가져갔다고 하신다

본능적으로 반발하는 마음이 생긴다

엄니한테 서운한 일 있다고 한동안 오지 않았던 큰딸이다

엄니 간병하러 왔다가 엄니가 식구들 밥해주라고 가란다고 하루 자고 올라간 양반이다

김치는 가져가지도 않는 작은고모는 엄니 아프다고 와서 김장했는데 형님은 오지 않았다

형님은 무슨 염치로 김치를 가져갔을까

형님을 흉보다가 바로 나의 옹졸함에 화들짝 놀란다

김장하면서 내가 보탠 수고가 얼마나 된다고 내가 주인행세하는가

몸 약하고 넉넉하게 살지 못하는 딸을 걱정하는 엄니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하고

비난하는 마음을 먼저 내는구나

김장할 때 며느리를 무슨 종 부리듯 하는 시모 때문에 힘들다는 며느리하소연이

한번도 내 사연인 적이 없었다

오히려 평생을 배려받고 칭찬받고 수고했다고 용돈까지 받았다

온실속의 화초처럼 모든 조건이 내게 호의적으로 갖추어져 그동안 내가 평온하게 잘 살아왔다

김치 한통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너그럽지 못한 내 본바탕을 보았다

엄니 아니였으면 난 불평불만으로 화병난 괴물이 되었을거 같다

 

참회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