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의 시간 - 순천 거차마을
엉성한 여행계획을 세우고 순천에 왔다
숙소에 비치된 순천팜플릿을 보니 거차마을에 가면 뻘배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언젠가 전라도닷컴에서 뻘배기사를 읽었다
엄니들이 뻘배 위에 한쪽 다리를 올려 무릎 꿇고 다른 다리로 뻘을 밀며 갯벌에서 움직였다
한뎃일이 여름은 얼마나 뜨거울 것이며 겨울은 또 얼마나 추울까
보는 것만으로 고되다
하지만 사진속 엄니들은 뻘흙투성이가 되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엄니들에게 갯벌은 자식을 키울 수 있게 한 '고마운 일터'였다
가난한 살림에 오직 몸공양으로 에미노릇을 제대로 해냈다는 자부심으로 엄니들은 당당했다
나는 자식을 키우는 긴세월 동안 단 한번도 흙투성이 에미로 치열했던 적이 없다
내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빠진거 같아 늙은 엄니들 앞에서 기가 죽었다
엄니들을 만난다는 기대로 마음이 설렌다
한편으로는 불안하다
엄중한 생계의 현장을 구경거리삼는다고 엄니들이 오해하지 않을까
갯벌에 도착해보니 엄니들은 없고 빈 뻘배만 몇 개 허술한 기둥에 묶여 있다
갯것이 지나간 흔적처럼 기다란 뻘배 자국만 몇 줄 남아있다
갯벌이 고즈넉하다
밀물의 시간이다
살랑살랑 밀물이 밀려들며 갯벌 위에 남아있는 엄니들의 고된 흔적을 덮는다
썰물이 들 때까지 밀물은 갯벌을 품고 엄니들을 쉬게 할 생각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사정 팍팍한 어느 에미 어둔 밤 불 밝혀들고 다시 갯벌을 서성거릴 것이다
'네가 에미로 열심히 산거 내가 안다'
'힘든 순간을 에미여서 잘 견뎌내며 산거 내가 안다'
밀물이 내 마음을 어루만진다
먼곳에 와 있는 지금 이 순간은 내 삶에 찾아든 밀물의 시간
거차마을을 오래오래 거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