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림자

이런 슬픔

천천히2 2020. 6. 3. 10:34

윤식이랑 용골산계곡길을 산책하고 내려오는 길에 아미사에 들러 약수를 마셨다

약수터 의자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데 보살님이 다가오더니 저쪽에 있는 음식상으로 초대를 한다

부처님 오신 날 절마당에 그늘막을 쳐놓고 신도 몇명이 다과를 하고 있었다

노인 몇분과 우리 연배의 사람들이다

내가 갈수록 넉살만 늘어 처음보는 사람들 틈에 명랑하게 인사하고 이물없이 앉았다

그들과 대화가 나름 잘 통해서 기분좋게 막걸리도 한잔 마셔가면서 잘 놀았다

대령으로 예편하셨다는 할아버지가 가방에서 명함을 꺼내 한참 만지작 거리다 건네신다

할아버지가 꼭 연락을 하라신다

여든이 다 되는 노인한테 무슨 경계심이 있을까

나도 꼭 연락을 드리겠다고 했다

나중에 윤식이신랑한테 이 얘기를 해줬더니 할아버지라서 그런거란다

자기는 마흔살 아래의 여인들만 눈에 들어온다네

설마 그 연세에 나를 여자로 보고 명함을 건네셨을까

 

그날 분위기가 유쾌해 꼭 연락드리겠다고 약속해놓고 며칠을 고민한다

썩 마음이 내키지 않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주신 명함을 가만히 바라본다

가장 기본적인 명함종이에 연구위원 대령이라고 인쇄가 되어있다

7년전에 효력이 끝난 명함이라고 하셨다

지나간 영광이 아쉬운 노인의 서글픔이 느껴진다

 

명주바람 불던 어느 봄날

이미 한참 늙어버린 몸과는 달리 더디 늙는 마음 한켠이 설레여

머뭇거리며 인생의 자부심이 새겨진 묵은 명함을 건네는 팔순의 남자라니

내 감정에 솔직하게 살고 싶어서 이제 하기 싫은건 안하고 싶지만 

이런 마음 앞에서는 친절해야 한다

명함을 버리려다 차마 그러지 못하고 할아버지에게 안부문자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