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짧은얘기 - 3월~ 5월
2019년 3월 6일
탁이생일에 이쁘니랑 저녁을 먹기로 했다
당연히 자고 올 생각으로 다음날 기차표를 예매해놨는데
어제 이쁜이가 "저녁먹고 자구 가" 한다
살짝 당황했다
난 가족이니 자고 오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이쁜이한테 물어보지도 않았다
이쁘니만의 공간인데 내가 실수했다
예매안한 척했다
날마다 배운다
2019년 3월 11일
세희 만나고 들어온 탁이가 립스틱번진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며 이것보라고 한다
"니들 터미널에서 막 키쓰하고 그랬냐?"
"아니 사람없는데서 했지"
만화의 한장면처럼 귀엽다
"세희도 그러고 집에 갔어?"
"당연하지~"
"진짜?"
"아냐 화장 고치고 갔어"
인배생일이라 오빠랑 저녁을 먹었다
탁이가 그 입술 그대로 나가서 인배한테도 자랑한다
오빠가 탁이에게 용돈을 줬다
그 돈으로 키쓰학원등록한다고 너스레를 떤다
탁이의 밝고 순수한 청춘이 보기 참 좋다
2019년 3월 12일
수선화 애벌레가 하루동안 이만큼 날개를 폈다
2019년 3월 15일
길이가 일미터도 안돼 보이는 목줄에 묶여있는 개가 집 앞에서 폴짝폴짝 뛴다
안쓰럽다
점심시간에 하는 짧은 산책
1시까지는 사무실에 들어가야 한다
내 목줄도 그리 길지는 않구나
2019년 3월 15일
봄이다
가운데 초록빛 파 살아남았다
허옇게 마른 잎들이 말한다
"우리는 지켜냈다"
2019년 3월 17일
아홉시 넘어서 엄니한테 전화가 왔다
"마요네즈 무친거 너좀 가져가라고 한다는게 내가 까먹었구나
맛있는데 너도 좀 갖다 먹을걸 아휴 내가 정신이 이렇다
지금 먹었는데 아주 맛있구나
고맙다 맛있는데 좀 갖구가서 너두 먹지"
사과 고구마 단감 썰어 마요네즈로 비벼놓은 샐러드 하나 갖구 엄니가 몇번이구 맛있다구 고맙다구 하신다
감기로 고생하셨다더니 엄니가 많이 외로우셨나보다
2019년 3월 23일
탁이생일축하하러 바이킹스워프에 갔다
부페가면 본전 아까운 탁이라 망설여졌지만
전에 이쁜이랑 나랑만 갔었던게 항상 마음에 걸렸던 터라 큰 맘 먹었다
서울가는 차 안에서 탁이가 말한다
"술마시면 다음날 잘 못먹어서 어제 술안마셨어"
뿌듯하게도 이쁘니도 탁이도 아주 잘 먹었다
오늘 환율이 만천삼백원
삼십삼만구천원나왔다
어마어마한 돈인데 우리탁이랑 이쁘니랑 같이 쓰면 또 그냥 써지는 돈이다
2019년 3월 24일
탁이가 꼭 먹어봐야한다는 용산역 짬뽕집이었다
청년 하나가 들어와 우리 테이블 옆에 앉으려 했다
직원이 곧 점심시간이어서 그러니 저쪽 이인용 테이블에 앉아 달라고 한다
청년이 싫다고 난 여기 앉을 거라고 한다
직원이 다시 한번 부탁한다
그 청년 그냥 식당을 나가버린다
탁이가 말한다
"저러면 엄마아빠 욕먹이는건데"
탁이가 그 말하는데 참 든든했다
2019년 3월 29일
"어스 진짜 무서워"
"그 무서운걸 세희랑 봤어? 세희도 공포영화 좋아해?"
"아니"
"근데 왜?"
"무서워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그래서 세희 너무나 귀여웠어?"
"근데 영화가 너무 재밌어서 세희 볼 시간이 없었어"
2019년 4월 16일
감사함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9년 4월 25일
무성해지기 전
억세지기 전
진해지기 전
너무나 사랑스런 요즈음 숲
2019년 4월 25일
앞머리만 자르려고 퇴근 후 미장원에 갔다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배가 고팠다
미장원에서 간식으로 준비해놓은 빵을 먹을까 하다가 참았다
앞머리깎는 비용을 안받을지도 모르는데 빵까지 먹을 수는 없지
원장님이 요리조리 몇번 가위질을 하고 끝났다
앞머리만 깎는거는 처음이라 얼마드려야 할지 물었다
삼천원이다
아주 절묘한 금액같다
오천원이면 내가 부담스럽고 이천원이면 원장님이 서운할 수 있다
삼천원으로 머리가 아주 가벼워져 행복했다
2019년 4월 28일
그냥 쉬고 싶어서 엄니한테 일이 있어 오늘 못간다고 전화를 드렸다
엄니가 개떡 만들고 있는데 어쩐대니 아쉬워하신다
할 수 없이 신양가는 네시반차를 타고 산정서 걸어갔다
개떡이 쫀득쫀득 너무 맛있다
도와드리지 못한게 염치 없어 몇개만 봉지만 담는데 엄니가 자꾸 더 담으라고 하신다
죄송해서 그래요 했더니
"뭐가 죄송하냐 놀면서 안온 것도 아닌디"
놀면서 안왔던 며느리는 아주 뜨끔했다
2019년 4월 29일
영영 이별했다
곁에 있어도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2019년 5월 2일
파란하늘에 겹쳐지는 신록의 가지들
키큰 나무들 틈사이로 축복처럼 쏟아지는 햇빛을 받아 빛나는 여린 풀잎들
탁이와 이쁜이한테 보여주고 싶은 이렇게나 아름다운 세상
2019년 5월 2일
체중이 늘고 있다
긴장좀해야겠다
저녁을 일찍 먹은 뒤 자두하고 평소보다 더 오래 산책했다
아홉시쯤 탁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세희가 나하고 먹으라고 치킨쿠폰을 보냈다며 알바 끝나고 사갖고 온단다
열한시 반에 치킨이라니 치킨이라니~~
반드시 피해야 할 크나큰 복병이다
허나 뭣이 중요하다고 이처럼 행복한 일을 마다할까
밤 열두시에 탁이 여자친구가 나를 생각해서 보낸 치킨을
알바하느라 힘들었을 탁이와 함께 맛있게 먹었다
탁이 올 시간이 되니 우리 자두가 현관문만 바라보고 있다
2019년 5월 4일
쌍소배기차부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몇분이 버스에 오르셨다
버스가 출발하고 좀 지났는데 할머니 한분이 갑자기 약봉지!!하며 벌떡 일어나신다
차턱 의자에다 짐은 놓고 몸만 타신게다
"이 차 타야되는데 아이구 어쩐댜"
할머니가 황망하게 내리신다
무뚝뚝하게 생긴 기사아저씨 인상으로봐서 그냥 출발할 줄 알았다
근데 기다리신다
"기다려주실거예요?"물으니 "어쩐대유 기다려야지"하신다
혹시 할머니 짐이 무거울까 싶어 나도 차에서 내려 차턱으로 향했다
저쪽에서 할머니가 까만 봉다리 하나 달랑거리며 허둥지둥 위태위태하게 뛰신다
마음은 급해서 뛰는데 아픈 다리가 말을 안들으니 온몸이 휘청거린다
애타는 할머니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할머니를 안심시키며 함께 걸었다
기다려주는 시골버스가 너무 고마웠다
2019년 5월 5일
탁이랑 이쁜이가 내 사진이라고 한다
2019년 5월 5일
서울서 이쁜이랑 탁이랑 밥을 먹었다
만두 두판 볶음밥 우동 두개 탕슉 두부튀김 오징어튀김
양이 많지 않아 그냥 막 시켰다
나중에 계산서를 보니 98,000원이 나왔다
아무리 봐도 그냥 대만분식집인데 뭔 이런 금액이 나왔나 모르겠다
2019년 5월 8일
이십대초반으로 보이는 애기엄마가 아장아장 뒤뚱거리는 아이를 어린이집 차에 태운다
아이가 가기 싫다고 버틴다
에구 더 데리고 있지 직장도 안다니는거 같은데 저렇게 어린 애기를 쯧쯧
속으로 흉봤다
어느날 애기엄마가 유모차를 끌고 나왔는데 거기에 더 어린 애기가 누워있었다
아 저렇게 어린 애기가 있었구나 그런 줄도 모르고 내가 참...
반성했다
오늘 유모차에 누워있던 그 애기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모습을 봤다
아니 걷지도 못하는 애기를!!!놀라서 애기엄마를 쳐다보다가
내가 그 애기엄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알지도 못하면서 누구를 쉽게 비난하는게 너무 자연스럽다
조심해야 한다
2019년 5월 8일
늑대아이의 하나는 아버지가 꽃처럼 웃으며 살라고 지어준 이름이다
인생후르츠의 히데코의 엄마도 언제나 미소를 잃지 말라고 가르쳤다
속마음을 감추고 슬퍼도 늘 웃어야 하다니
그 마음이 참 쓸쓸하겠다 생각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나 자신에게 짓는 미소다
내 삶을 향해 짓는 미소다
내 미소에 내 마음이 따뜻해지고 행복해진다
참 중요한 말이다
2019년 5월 14일
탁이 동급생엄마가 세희엄마랑 친구인데 딸한테 들었다면서 탁이가 바람둥이라고 했단다
고등학교시절 오매불망 효민이뿐이었던 탁이가 분해서 어쩔 줄을 몰라한다
나도 분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말 함부로 하는 사람이 제일 경멸스럽다
탁이가 상처받지 않도록 어떻게 위로를 해줘야 하나
"탁이가 어렸을 때 잠자리에서 늘 기도했어
하늘처럼 높고 맑아라
땅처럼 깊고 넓어라
해와 달처럼 밝게 빛나라
산처럼 순수하고 힘차라
이해하기 힘든 일이 생겨서 우리탁이가 힘들 때 저 기도를 생각하고 중심을 잘 잡기를 바래
내 중심이 잘 서면 돼"
탁이가 이 기도를 기억하고 있었다
세상이 좁아서 탁이가 알바하는 곳 점장님 친구가 또 세희엄마친구란다
점장님이 우연히 탁이얘기를 알고는 걱정하지 말라고 세희엄마한테 탁이얘기해준다고 했단다
탁이가 웃으며 말한다
"그래도 내가 잘 살았나벼"
2019년 5월 25일
엄니하고 이주일만에 통화를 했다
"희경어메냐 아이구 한달은 된거 같다"
주말에도 출근하느라 못가는데 엄니가 나를 많이 기다리시는구나
2019년 5월 31일
매일 아침 치자화분에 물을 뿌리면서 꽃봉오리도 못봤는데
오늘 아침에 이렇게 활짝 핀 꽃을 보았다
치자가 돌아앉아 고개 숙이고 꽃을 피우고는 나에게 서프라이즈한게다
너무나 행복한 아침이다
Dos Gardenias (치자꽃 두송이)
Buena Vista Social Club
그대에게 치자꽃 두송이를 주었네
내 삶에서 당신을
사랑한다는 의미도 함께 담아서
잘 돌봐주세요.
그건 당신과 나의 마음이랍니다 그대에게 치자꽃 두송이를 주었네
한번의 날카로운 키스에
모든 온기를 담아서
내가 당신에게 주었던 것처럼
다른 이와의 포옹에서는 알 수 없는 입맞춤 당신 곁에 살아서
내가 하던것처럼 말하네
그 꽃들이 "당신을 사랑해요" 라고
말하는걸 들으면서 당신은 믿어요
만약에 아주 만약에
늦은 밤 치자꽃이 죽어버린다면
당신이 날 배신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걸 그 꽃들이
알아버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