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콜콜

2018년 짧은얘기 - 8월-10월

천천히2 2018. 8. 20. 11:38

2018년 8월 19일

차턱에서 대술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길건너편에서 미선이가 나를 부른다

중학생 딸과 함께 피자를 사갖고 가는 길이다

"언니 피자드실래요?"하길래

"조치 여기다 피자" 실없는 농담을 건넸다

그런데 미선이가 "그럴까요?"하면서 길을 건너온다

미선이표정이 진지하다

미선이 딸내미도 피자박스를 내려놓으려 하는 엄마옆에서 진지하게 음료수봉지를 내민다

깜짝 놀래서 뭐여 뭐여 했더니

 "어때요? 여기서 한조각 먹구가요"

너무너무 진지한 모녀를 달래서 보내는데 한참 걸렸다

머 이렇게 순수한 모녀가 다 있냐


2018년 8월 26일

나의 조증은 탁이와 이쁘니 덕이다

내 마음에 흡족한 탁이와 이쁘니 덕으로 내가 일상이 행복으로 방방떴다

탁이가 휴가나와서 방을 난장판 만들고 이불덮고 에어컨 틀고

이쁘니가 여행갔다와서 나한테 삐져서 내말에 시큰둥하니

일상이 전혀 행복하지 않다

내 삶이 탁이와 이쁜이 영향을 너무 많이 받는거 같아서 걱정이다


2018년 8월 28일

남편의 순례길에 아내가 함께였다

아내가 먹을 것과 잘 것과 입을 것들로 가득한 수레를 끌었다

그들곁에 당나귀 한마리가 따라간다

차를 마시며 남편이 밝은 얼굴로 말한다

"당나귀가 어려울까봐 오르막길에서만 수레를 끌게 합니다"

그의 아내는 곁에서 아무 말도 없이 다소곳하게 앉아있다

차를 한잔 마시고 남편이 다시 나무장갑을 끼고 일어선다

아내가 수레손잡이 안쪽으로 들어가 두손을 들어 손잡이를 당겨 허리께로 내린다

그녀의 몸짓에서 수레의 무게가 느껴졌다


2018년 8월 28일

산악지대의 척박한 환경에서 간신히 의식주를 해결하며 사는 사람이

저 거지와 다를바 없은 행색으로 길에 온몸을 던지며 기도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가족과 이웃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그리고 나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간신히 살아내는 사람들이 어찌 이토록 간절하게 타인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지

나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구나



지나가는 노인이 참견한다

젊은이 순례길에는 빨간색은 피하는게 좋아 머리에 아무것도 쓰면 안돼

꼬마아가씨 절하는 중간에 너무 많이 걷는구나 7~8걸음만 걸어야 하는거야

이마가 땅에 닿아야 해


아저씨 가던 길이나 가세요

우리 지금 엄청 힘들거든요

이 대단한 일을 하는데 격려는 못해줄망정 옆에서 말하기 쉽다고 훈수를 하시네요

아휴 승질나 신경질나


난 보나마나 이럴 것이다

백프로 이백프로 이럴 것이라 확신한다

그러나 그들은 순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네" 할 뿐이었다


2018년 9월 1일

버스 한대 겨우 지나다니는 이티가는 길

아이들 서넛이 길가에 나란히 멈춰 서서 내가 탄 버스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초록색 미니버스가 천천히 아이들 앞을 지나가니 한 아이가 기사한테 안녕하세요 한다

그러자 너두나두 재잘재잘 안녕하세요 한다

순박한 아이들 정겨운 시골풍경이다

 

2018년 8월  31일

산책을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고속버스가 내옆으로 파고든다

반대차선 샛길에서 나온 승용차를 피한 것이다

버스와 나의 간격이 일미터도 안됐다

산책길이 저승길이 될 수도 있는 순간이엇다

별일없는 이 순간이 기적이다


2018년 9월 2일

말할 수 없는 비밀에서

상륜이 샤오위에게 가기 위해 무너져내리는 건물에서 피아노를 친다

열아홉 어린 남학생이 사랑에 목숨을 건 것이다

상륜에게 나는 간절하게 말한다

"그러지마 지금 그 사랑이 어떻게 변할 줄 알고 니 목숨을 거는거니 사랑 그거 그렇게 대단한거 아니야"

하지만 저 순간 상륜은 마음이 너무나 뜨거워 아무말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탁이나 이쁜이도 그렇게 살겠지

누구의 코치도 상관없이 그순간의 가슴으로 겪어내며 살겠지

내가 그랬던 것처럼....

탁이와 이쁜이의 삶에 거리를 두어야 하는 이유다


2018년 9월 9일

탁이제대기념으로 세븐스프링스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쁘니는 독하게 다이어트중이라 샐러드 한그릇 갖다 놓고는 끝이고

탁이는 초밥 몇개 먹고 끝이다

나만 바쁘게 오간다

그나마 나도 인자 양이 줄어 많이 먹지를 못하겠다

제대로 못먹고 와서 돈이 아깝다고 했더니 탁이가 하는 말

"먹고 싶은 거 먹었으면 된거지 그런데가서 많이 못먹어서 아깝다고 하면 추해"

이 자식 지가 돈 안낸다고 아주 교양있다


2018년 9월 11일

막례할머니 동영상을 보는데 이 할머니 참 거침이 없다

자기검열이 없어 보인다

어느 상황에서든 누구를 만나는 거침이 없다

스스로에게 아무 제동을 걸지 않으니 행동과 말이 물흐르듯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내가 도달하고 싶은 경지다


2018년 9월 13일


감나무 열매가 탐스럽다

더러더러 노랗게 물들어간다

야무진 꽃받침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기만 하면 되건만

무슨 일로

어느 것은 흔적도 없고

어느 것은 태어난 자리에서 꺼멓게 어린 미이라가 되어버렸다

대견하게 제대로 자란 열매옆에 있는 그것들이 마음아프다


2018년 9월 17일

호박따갖고 사무실앞에 오셨다는 엄니전화를 받고 나갔다

엄니가 보이지 않아 한참을 두리번두리번

저쪽 미장원 앞 계단에 앉아계신다

조그맣게 앉아계신 모습이 귀여워 웃었다

엄니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신다

환하게 웃는 엄니모습이 울컥할만큼 좋았다


2018년 9월 19일

신동엽문학관 마당에 있던 허공에서 펄럭이는 문장과

티벳 성지에 나부끼는 타르초가 닮았다


2018년 9월 20일

사무실 간식시간

직원들이 탁자에 옹기종기 모여앉았다

거래처 직원 누구의 남편이 바람을 폈다는 얘기가 나왔다

그 직원은 이혼을 하지 않고 남편과 따로 살기로 했단다

남편 본가의 재산이 꽤 되는 집이라고 한다

내막을 잘 알지 못하는 직원들의 아니면말고식 추정에 의해

그 직원은 시댁 재산 때문에 이혼을 안하고 버티는 영악한 여자가 됐다

남편이 바람을 폈고 이혼하지 않고 따로 사는 나는 그 수다가 불편해 내 자리로 돌아온다

직원들의 수다는 오래오래 계속되고 나는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그 이야기를 듣는다

일상이다

내가 저들이라면 난 저러지않을 것이다


2018년 9월 22일

송편빚던 엄니가 내 얼굴을 빤히 보시더니 얼굴에 뭐가 그렇게 났냐고 하신다

돋보기 쓰고 거울을 들여다보니 세상에나 검버섯이 여기저기 깔렸다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걷고 또 걸을거라고 했는데 검버섯 앞에서 그 마음이 주춤한다


2018년 9월 24일

미자를 통해 현숙이 딸이 부모가 반대하는 남자친구랑 결혼한다고 해서 현숙이가 너무 힘들어했다는 얘기는 들었다

오늘 몇년만에 현숙이를 만나 사연을 들었는데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얘기였다 

남자친구 평판이 너무 좋지 않아 현숙이랑 할아버지가 무릎을 꿇고 울면서 헤어지라고 사정하는데도

딸이 고집을 꺾지 않고 가출해서는 결국 지들끼리 식을 올렸단다

현숙이가 그 시간을 어찌 견뎌냈을까 가슴이 아팠다

나는 현숙이처럼 견뎌내지 못했을 것 같다

이쁜이한테 물으니 이미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었던 이쁜니는 그렇게까지 결혼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탁이는 걱정마 착한 여자 데려올게 한다

설마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까 싶지만

현숙이는 그럴 줄 상상이나 했겠나


2018년 9월 24일

미자를 만났다

칠년 가까이 못봤다

내 얼굴을 보더니 순한 할머니로 늙을거 같다고 했다

내 눈빛이 꿈을 꾸는 눈빛이라고도 했다

이보다 기분좋은 말이 또 있을까


2018년 10월 1일

탁이한테 김밥주문을 맡겼더니 오천원짜리를 안하고 삼천원짜리 두개를 시켰다

이쁘니한테 말해주었더니 기안84란다

아무래도 그런거 같다


2018년 10월 5일

지랄쟁이가 오늘은 9시 10분에 출근했다

늘 아홉시 넘어 출근하는데도 과장이고 대리고 머라는 사람도 없다

만일 내가 저러면 벌써 난리가 났을 것이다

만만한 사람한테만 왕탱이처럼 덤벼드는 꼴이 새삼 승질이 난다

가만있어보자 과장이나 대리가 뭐라 안하면 나는 아홉시 넘어서 출근할건가?

그건 또 아니다

나는 지킬건 지키며 경우바르게 살고 싶다

그럼 지랄쟁이처럼 못해서 안달할 것도 없네

내가 괜히 혼자 감정낭비하고 있다


2018년 10월 7일

오소희작가가 남편생일에 고마워편지를 선물했는데 그 내용이 참 감동적이다

"걸을 때 언제나 손을 잡아줘서 고마워.
내가 밥을 차려주면 매번 고마워. 정말 잘 먹었어라고 말해줘서 고마워.
내가 아들 때문에 힘들면 나쁜넘!”이라고 해줘서, 딱 거기까지만 해줘서 고마워

내가 말할 때, 얼른 폰에서 눈을 떼고 나를 쳐다봐줘서 고마워....."

오소희 남편이 참 자상하고 배려심 많은 남자고 오소희는 섬세하고 다정한 사람이다

탁이가 생각나 편지를 인쇄했다

함께 도라지차를 마시며 탁이에게 읽어줬다

"탁아 엄니는 엄니가 너무나 충만하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한 남자의 아내로서는 아쉬운게 참 많어 이 글을 읽는데 참 부럽더라 나중에 우리 탁이가 아내한테 이런 남편이 됐으면 좋겠어 이렇게 작은 일에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 탁이가 알았으면 좋겠어"

우리탁이가 조용한 얼굴로 나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었다


2018년 10월 24일

엄마아부지 기일이다

엄마아부지한테 말했다

날 세상에 태어나게 해줘서 고마워

세상이 참 아름답고 나 행복해


2018년 10월 25일


폭포가 쏟아지는 산으로 올라가던 올리버가 잠깐 뒤를 돌아본다

그 시선이 무슨 의미인지 오랫동안 궁금했다

오늘 산책을 하다가 드디어 그 의미를 찾았다

그 어떤 편견도 없는 곳에서 엘리와 온전히 사랑할 수 있다는 벅찬 해방감이었다

자유로운 사랑

저 아래 보이는 세상과 상관없이 순수하게 엘리와 올리만이 존재하는 이곳

저 시선의 의미를 알기 전에도 이 장면이 애틋해 눈물이 났었다


2018년 10월 26일


오늘 비가 온다는데.............................


2018년 10월 31일

점심때 고덕갈비로 회식을 갔다

맛집으로 소문이 난 곳이라 평일인데도 대기줄이 길었다

우리도 기다리는데 수임업체 사장님이 거래처손님을 모시고 왔다

사장님이랑 편법으로 합석했다

직원 여섯명이 저쪽 테이블에 앉고

우리직원 셋 수임업체 사장님 거래처손님 둘이 한 테이블에 앉았다

밥먹는 시간이 어색할까봐 걱정했는데 다행스럽게도 대화가 잘 통했다

낯선 사람과 적당한 화제를 찾아내 재밌게 얘기하는 내 자신이 참 좋았다

이렇게 대화를 즐기는데 사무실직원들하고 대화하는건 너무 힘들어한다

진짜진짜 너무 힘들고 두려운 일이다


2018년 10월 31일

친구랑 피시방갔다가 늦게 들어온 탁이가 한참있다 나를 부른다

"자두 산책시켰어?"

"응 어케 알았어?"

"코골며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