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니

읍내장날

천천히2 2017. 9. 11. 17:41

일요일 아침 자두랑 꿀잠을 자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시계를 보니 아홉시 반이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전화할 사람은 엄니밖에 없다

엄니목소리가 기운이 하나도 없다

"내가 입맛이 없어서 짜장면을 좀 먹구 싶은디 너두 나올래?"

열한시에 동흥루에서 엄니와 만났다

여름내내 뜨거운 햇빛에 시달린 엄니가 오늘따라 바스라질 것처럼 얇아보인다

엄니는 짬뽕 나는 짜장을 시켰다

나도 짬뽕을 먹구 싶었는데 엄니가 다 못드실거 같아 엄니거를 좀 덜어먹을 생각이었다

웬걸 엄니가 오징어 하나만 건져주시고는 짬뽕 한 그릇을 아주 맛나게 다 드신다

엄니가 비운 짬뽕 그릇을 보니 내가 뿌듯하다

밥값은 엄니가 냈는데 내가 왜 뿌듯한지 모르겠다

 

장터로 내려가다가 옷가게에 들어갔다

이쁜이가 월급탔다고 엄니 옷사드리라고 했다 하니 그렇게나 좋아하신다

엄니는 허리가 아파 의자에 앉아 계신다

엄니한테 회색빛 옷을 갖다 보여드렸다

"애 그런 색은 싫다~"엄니가 질색하신다

보라색패딩을 보여드렸더니 이번엔 슬그머니 주인에게 옷값을 물으신다

가격을 듣고는 "아이구 너무 비싸다 안사" 한 말씀 하시고 꼼짝을 안하신다

엄니 고집이 황소고집인 걸 아는지라 입어라도 보시라고 몇번 권하다 포기했다

빈손으로 옷가게를 나와 걷는데 엄니가 시장가면 저런거 오만원한다고 저런 가게는 옷이 비싸다고 하신다

"엄니 그래도 저런디 옷이 이쁘잖아요 색깔도 고급지고 이쁜이가 마음먹고 사드리는건데 이럴 때 좋은 옷 한번 입으시면 좋잖아요~"

내 말을 듣고 엄니가 머뭇머뭇 하시길래 혹시나 해서 다시 가보자고 슬쩍 말씀드렸더니 

엄니가 순순히 발걸음을 돌리신다

엄니 이러시는거 처음이라 속으로 깜짝 놀랐다

엄니가 그 옷이 아주 마음에 들었었구나

내가 다시 얘기 안꺼냈으면 울엄니 아쉬워서 어쩔 뻔 했대

물색도 좋고 가볍고 엄니한테 아주 잘 어울린다

엄니가 엄청 좋아하신다

뿌듯하다

 

장에 가서 무수 하나 사고 마른 새우 한됫박 샀다

조금만 걸어도 허리가 아파서 앉을 데를 찾는 엄니가

저기 어디 장날에 하드를 삼백원에 파는데가 있다고 사줄테니 가자고 하신다

하드 파는 그 슈퍼까지 엄니걸음에 맞춰 천천히 걸으니 거의 십분이 걸린다

가게서 하드 먹어가메 뭐 필요한거 없나 둘러보다 커피도 사고 고무장갑도 사고 오미자식초 담글 막걸리도 사고 해서 이만원 썼다

하드 삼백원이 괜히 삼백원인감

그래도 덕분에 엄니의 느린 걸음 따라 세월아 네월아 걸으며 읍내구경 잘했다 

 

집에 와서 옷산거 이쁜이한테 사진찍어보낸다고 했더니

이왕이면 입은거 찍는게 좋지 않겄냐 하시며 브이 하신다

엄니가 구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