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짧은얘기(3월)
2014년 3월 2일
엄니가 문해교실에 나가실거라고 하신다
빨간색 필통에 연필 네자루와 지우개 하나 담아 선물로 드렸다
군소식지에서 문해교실을 다니는 할머니들이 쓴 글을 읽을 때마다
순박하고 맑은 기운에 흠뻑 취하곤 했다
머잖아 우리엄니글도 읽게 되려나
2014년 3월 6일
출근길이 상쾌해 혼자 웃는다
성당마당을 지나는데 할머니 한 분이 들어오시다 나와 눈이 마주친다
할머니가 웃는다
나도 웃으며 할머니에게 가볍게 인사한다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
모르는 사람끼리 나누는 인사가 날 무척이나 행복하게 만들었다
2013년 3월 5일
하늘이 아주 파랗다
이쁘다
2014년 3월 6일
트랙으로 걷다가 물가로 내려갔다
몇발자국 내려왔을 뿐인데 안들리던 물소리가 들린다
쫄랑쫄랑? 꼴랑꼴랑? 꿀렁꿀렁?
물가 돌에 살짝살짝 부딪치는 물소리가 귀엽다
헌꽃과 새꽃이 만났다
서로가 되게 신기한가보다
헌꽃이 내려다보고
새꽃이 올려다본다
2014년 3월 11일
열흘이 지났다 풀잎이 슬슬 일어나기 시작했다
할 수 있는 만큼 납작하게 엎드려있을 것
그래야 추운 겨울 살아남을 수 있느니
커다란 잎파리의 풀은 신중하고 진중하다
따순 이른봄 햇살에 작은잎파리를 가진 풀이 나폴나폴 일어나고 있는 지금도
커다란 잎파리를 가진 풀은 아직 납작하다
2014년 3월 11일
탁이가 부반장이 됐다
공부못한다고 기죽지 않은거 같아서 기분이 좋다
2014년 3월 14일
비온 다음날 더 이뻐보이는 새순
발굽이 두개로 갈라진 발자욱이 논으로 향해있다
누구지?
고라니밖에 생각나는 이름이 없구나
논두렁에 난 내 발자욱을 보고 얘도 누구지? 궁금해할까?
2014년 3월 14일
찬바람에 코가 빨개진 탁이가 근혁이랑 사무실에 왔다
근혁이 코도 빨갛다
의리지키느라 고생한다
친구들 네명이서 의리모임을 만들었단다
의리! 한마디에 같이 움직이기로 했다는데
셋이 졸고 한명이 화장실 갈 때 의리!하면 졸다가도 일어나서 같이 간다는 어이없는 의리다
오늘의 의리미션은 잠바 없이 교복만 입고 학교가기
네명이서 하루종일 얼마나 떨었을꼬
귀여운 청춘들이다
2014년 3월 19일
화장실입구에 어제 청소하고 빨지 않은 걸레가 있다
이걸 빨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걸레질을 한 직원이 평소 일을 떠넘기는 스타일이라
그냥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이 사이에 채소줄기 하나 낀 것마냥 마음이 불편하다
그래도 하기 싫으니 하지 말기로 한다
이러는 내가 웃겨서 혼자 실실 웃는다
2014년 3월 19일
기분좋은 아침 출근길
뒤에서 빵빵 경적이 울린다
옆으로 비켜선다
그래도 빵빵
이렇게 길이 넓은데 왜 이려~ 마음이 뾰족해진다
뒤돌아보니 택시다
비키라는게 아니라 택시니까 봐달라는건가보다
택시의 영업에 내 아침기분이 흔들리는게 짜증이 된다
몇걸음 걷다 축복을 해준다
"오늘 고생하시는 만큼 보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마음의 여유가 생길 것이고 당신이 여유가 생기면 경적을 한번 덜 울릴 것이고
그러면 나도 행복해지는 것이지요"
2014년 3월 21일
허리께 오는 낮은담장밖으로 진달래가 고개를 내밀었다
올해는 꽃봉오리도 보기 전에 만개한 진달래를 보게 되네
매일 개울 이편으로만 지나다녔더니 개울 저편동네길에 이런 일이 있는 줄도 몰랐다
바람부는 날이면 바스락바스락 마른넝쿨사이로 지나는 바람소리
소리울타리
2014년 3월 22일
군자란 꽃잎이 뚝 떨어졌다
때가 돼서 떨어지는 꽃잎이라면 낙화의 애잔함이 남을 터인데
느닷없이 추락해버린 꽃잎은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한다
우리 둘다 황망하다
2014년 3월 22일
자연은 어떤 모양으로 담겨도 이쁘구나
문예회관 이층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들
2014년 3월 25일
고요하고 평화롭다
2014년 3월 26일
2014년 3월 26일
볕이 나는데 달팽이 한마리가 길로 슬슬 기어나온다
발로 앞을 막으니 이게 뭔가 싶은가보다
한참동안 멈춰있다 슬금슬금 내 신발위로 기어오른다
오늘 산책길은 길가운데로 기어나온 달팽이새끼를 주워 풀섶에 놓느라 바빴다
니들 땜에 내가 아주 애가 탄다
2014년 3월 27일
봄풀은 새잎이 나면서 젊어지고
사람은 흰머리 나면서 늙어지고
2014년 3월 28일
가끔 차다니고 내가 매일 걸어다니는 햇빛쨍쨍한 농로
농로 한가운데 달팽이들이 여기저기서 동작그만
내일 비온다는데 부디 그때까지 무사하기를
31일 월요일 비온 줄 몰랐나 돌아갈 길 잊었나..바보같이 그대로 있다
차무서운줄 모르고 내 큰 발 무서운줄 모르는 바보같은 것들..
2014년 3월 28일
결심하기가 어렵지 한번 마음 먹으면야.....
이 모습으로 참 오래오래 망설이더라
2014년 3월 28일
산책길 벤치에 할아버지가 앉아계신다
쓸쓸해보여 인사를 건넨다
언젠가 엘리베이터에서 자주 만나는 할머니가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유?
"젊은 사람이랑 얘기하니 좋네"
내 대답을 듣고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다
늙는게 참 슬프다
2014년 3월 29일
향이 피워올리는 연기를 보다 문득 생각하니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담배연기에 마음이 풀어지는거구나
2013년 3월 31일
삼월의 논두렁이 이렇게 아름답구나
풀들은 내가 한번 밟은 것쯤은 상관도 하지 않고 건강하다
저쪽 마른길바닥에 붙어있는 달팽이들도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
2014년 4월 10일
여행내내 민경훈의 남자를 몰라를 들은 탁이
가사가 너무 가슴 아팠다
"아이고 이 노래 참 너무 절절하다
엄니는 탁이가 이런 사랑하면 너무 가슴이 아플거 같애 안했으면 좋겠다"
"이미 하고 있는데.."
좋아하는 여자애가 생겨서 대만여행갔다와서 고백하려고 했는데
여행가기 전날 페이스북에 연애중이 떴다
여행내내 심란해하는 탁이를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그마음이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