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림자

샤워기가 고장났다

천천히2 2013. 11. 19. 16:49

샤워기가 고장났다

중간에서 물이 줄줄 샌다

샤워기 하나 고장났을 뿐인데 어제 아침과 오늘 아침이 많이 다르다

매일 아침 따뜻한 물줄기를 맞으며 오래오래 샤워하는 시간이 행복하다

온몸에 따뜻한 기운이 돌며 마음까지 야들야들 풀어진다

세상에는 물이 부족한 곳도 많고

에너지가 부족한 곳도 많은데 내가 참 호사로구나

매일매일 미안하면서 감사한 시간이다

 

세수대야에 물이 채워지기를 기다리고

변기 위에 올려놓고

허리를 숙여 머리를 감는다

몇번 반복되는 이 과정이 새삼스럽다

어렸을 때 타일붙인 욕조난간에 세수대야 올려놓고 이렇게 머리감다가

스댕세수대야가 떨어져 발가락을 여러번 찧었다

지난 여름 여행하면서도 여러날을 이렇게 씻었다

오래전 얘기고 여행지의 얘기다

지금은 내 집에서 일어나는 일상이다

그래서 그런가 새삼스럽게 엄청 불편하다

 

샤워기를 사용할 때보다 세숫대야를 쓰니 물을 훨씬 덜 쓰는거 같다

불편해도 이렇게 살아야 하는거 아닌가

허나 따뜻한 샤워를 하고 난후 부드러워진 몸과 마음으로 나서는 출근길의 깃털같은 상쾌함을 놓치 못하겠다

누구에게는 사치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곳의 나에게는 평범한 일이다

어려운 환경에 있는 이들의 기준에 맞춰 산다는 것은 내게 너무 힘든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미안해하고 눈을 감는게 비겁하지만

지금의 소비와 편리함에 이미 중독된 나는 어쩌지를 못하겠다

지금보다 내가 더 편하고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어제 고장난 샤워기를 오늘 고쳤다

거침없이 쏟아지는 따뜻한 물줄기가 이렇게 좋구나

내가 누리는 모든 것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