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림자

버려지다

천천히2 2012. 6. 5. 15:20

 

 

소득세신고하느라 평일야근과 토요일 일요일 없는 오월 한달을 보냈다

오랜만에 들판에 나가보니 내가 그렇게 정신없이 일하는 동안 모내기가 다 끝났다

논에 아주 어린 모들이 줄지어 나란하다

탈모자리 털나듯 엉성하다

얘네들이 금새 새끼치고 키를 키워 논바닥을 채우겠지

모가 쑥쑥 자라는 상상으로 마음이 뿌듯하다

그런데 논 한귀퉁이에 똑같은 애들이 뭉텅이로 버려졌다

저 멀리 논에 심어진 모들이 안보이는 곳에 던져버리기라도 하지

희망고문도 아니고 바로 옆에다 이렇게 버리다니 애네들한테는 너무한 처시다

 

이른봄부터 육묘장에서 씨앗 잘 틔우고 작은잎 쏙쏙 키워 여기까지 왔는데

논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이렇게 버려지고 말았다

지나가는 바람이 논물을 살그머니 간지르는 이 자리에서

새끼치며 꼿꼿히 잘 자라고 있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허옇게 말라가는 버려진 모가 기구하다

운명이라면 너무 가혹하구나

아니지 운명이라고 할 수는 없지

종자가 달라 처음부터 이렇게 버려질 운명은 아니었다

우연이다

조금이라도 먼저 기계에 실렸더라면 논바닥에 꽂혀 재들처럼 뿌리내리고 지금 바람따라 흔들리겠지

아주 작은 우연으로 갈린 한살이가 이리 다른거다

이러다 큰비라도 한번 지나가서 논에 빈자리가 생기면

사람들은 염치좋게도 버린 모중에서 살아남은걸 골라 다시 심기도 한다

아 너무 뻔뻔한거야

너무 잔인한거야

내가 만일 버려진 모라면 죽은 동료를 헤치며 산 모를 찾는 그 손을 찔러버리겠다 

야아아아~~~~~~~~~

그래도 그렇게라도 선택돼서 살아남는게 좋을려나

 

씨앗속에서 초록잎 싹이 되어 세상에 나올 때는 

바람 햇빛 공기 물 천지의 모든 기운과 농사꾼의 손길을 잘 갈무리해 

이쁜 쌀알 매달겠다는 꿈을 꾸었을 터인데 저렇게 논가에서 허옇게 말라가는구나

예비용 모 때문에 내가 참 많이 슬프다